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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양을 깔보니 재밌더냐

[한겨레] 쿠엔틴 타란티노 <킬빌>의 이상한 재복제… 서양인 주체로 내세우며 교묘하게 동양 왜곡

자상(刺傷)에서 선혈이 분수처럼 치솟는 참경으로 내게 처음 섬뜩한 이미지를 각인시킨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스바키 산주로>(1962)였다. 그 장면은 <요짐보>(1961)의 박력 있는 일 대 다수의 진검 승부보다도 한층 더 인상적이었다. 어째서 그런가 하고 묻는다면 ‘피’ 때문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제목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구도 에이치의 <대살진>(1964)에서 소수정예 무사들이 수백명의 적들과 아비규환의 대혈투를 벌이는 압도적인 마지막 대목조차 <스바키 산주로>의 핏줄기가 과시하는 강렬한 선홍색(흑백영화인데도 붉게 느껴진다)과 어깨를 견주기에는 족탈불급이었다.

하지만 이야기 구조의 차원에서 피는 복수를 부르는 일종의 영매다. 기독교 문명권에서 희생을 의미하는 피가 동양에서는 거의 무조건 복수의 정서를 환기시킨다. 피는 복수를 부르고 복수는 피를 동반한다. 투우사가 물레타에 감아들고 나오는 천의 붉은빛이 소가 아니라 관중을 흥분시키듯, 피는 관객의 눈길을 단숨에 휘어잡는다. ‘복수’도 마찬가지다. 피가 부족함에도 <벤허>(1959)의 인기가 유구한 것은 기독교 정신을 훌륭히 구현해서가 아니라 내용 자체가 드라마틱한 복수극인 덕이다. 그러니 뱀파이어물이 아님에도 피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킬빌>은 할리우드산 복수극으로서는 매우 예외적인 사례다. 감독이 수많은 영화들, 특히 일본과 홍콩 영화들을 집중적으로 인용했다는 사실이 중요해지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더불어 그 인용의 실체와 양상이 문제적일 가능성도 높아진다.

원본에 무신경한 복사본의 재복제

이 영화는 러닝타임 3시간이 넘는 대작을 둘로 쪼개놓은 것의 1편이다. 덕분에 이야기는 ‘빌을 죽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제일 먼저 스크린을 채우는 것은 난데없는 ‘홍콩’ 영화사 쇼브러더스 로고다. 게다가 후반부의 절정인, 도쿄의 나이트클럽 ‘청엽정’에서 주인공 우마 서먼이 수많은 칼잡이들과 홀로 맞서 일전을 벌이는 장면은 분명히 장철의 <복수>(1970)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1편이 홍콩영화보다는 일본영화의 자장 안에 있다고 해야 옳은 것은 우마 서먼이 복수의 대상으로 점찍은 다섯 인물들 중 일본의 이시이 오렌(루시 리우)을 제거하기까지의 과정이 골간이기 때문이다. 대사의 상당 부분이 일본어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따라서 청엽정의 결투 장면도 중심인물이 여자라는 점에서 60년대 후반을 빛나게 수놓았던 가토 다이의 여협영화 <붉은 모란 오류> 시리즈와 더 가까운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킬빌> 1편의 마지막에서 격정적인 일본어 주제가를 유장하게 흘려보내는 것은 <붉은 모란>의 방식 그대로다. 요컨대 쿠엔틴 타란티노가 공공연히 밝히고 있는 인용 영화들의 목록은 그 성격이 사실상 ‘원본의 복제’가 아니라 ‘복사본의 재복제’에 해당한다.

‘재복제’란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일종의 무신경이기도 하다. 더욱이 그 ‘대상’은 동양이고 ‘주체’는 서양이다. 미상불, 영화는 종횡무진 감행되는 인용의 미학으로 휘황찬란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하드고어 액션의 후련함과 피빛 카타르시스를 무색케 하는 까닭 모를 불쾌감이 은밀하게 준동한다. 서양영화, 특히 미국영화가 동양인 이미지의 본질을 일삼아 왜곡시켰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내게 인식시킨 영화는 블레이크 에드워즈의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이었다. 오래 전 그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창턱에 앉아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헨리 맨시니의 <문 리버>를 부르던 오드리 헵번에게 여지없이 매혹된 나는 동양인(일본인)의 이미지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묘사돼 있는가를 따져볼 여력이 없었다. 아름답고 품위 있는 서양인 주변에서, 차라리 광대라고나 해야 어울릴 그 일본인은 더할 나위 없는 감초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 정작 그 일본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마저 일본인이 아니라 할리우드의 유명배우 미키 루니라는 사실을 알고 아연실색했지만, 이미 완성된 영화를 바꿀 힘이 내게 있을 리 없었다.

그러면 이제는 시대가 달라져 동양인이 직접 동양인 캐릭터를 연기하니 괜찮은 걸까. <킬빌>은 그렇지 않다고 대놓고 떠벌린다. 대개 미국영화가 동양인을 비정상적인 이미지로 그리는 것은 이해 부족과 상업적인 계산 때문이다. <킬빌>은 일단 후자쪽에 가깝다고 느껴지지만 전자쪽의 혐의도 부정할 수 없다. 어쨌든 주요 관객은 일반 미국인들로 상정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동양인 관객에게 그 이미지를 함께 즐기자고 뻔뻔스럽게 권하기까지 한다. 액션이 화려할수록 또 동양인을 신비스럽게 그릴수록 이 권유가 거부감 없이 통한다는 사실을 감독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청엽정의 대혈투 과정에서다.

지난 광주국제영화제의 일본액션영화전을 통해 소개된 후카사쿠 긴지의 실록액션물 <의리의 무덤>(1975)을 본 사람이라면 <킬빌>이 오렌을 그와 똑같은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다. 바로 그 오렌이 청엽정에 백옥같이 하얀 기모노 차림으로 들어오고, 우마 서먼은 이소룡이 <사망유희>에서 착용하여 팬들에게 영원히 못 잊을 이미지를 각인시킨 저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고스란히 본뜬 듯한 옷을 입고 그곳에 잠입하면서 바야흐로 마지막 혈투는 시작된다. 우선 이 트레이닝복이 문제다. 옷이란 껍데기다. 단지 똑같은 옷을 입혔다고 그것을 존경의 의미가 담긴 오마주라 해석할 당위는 없다. 더욱이 이소룡은 미국문화권에서 성장한 사람이고 후기작 <용쟁호투>와 <사망유희>는 감독도 미국인이고 대사도 영어인 미국영화다.

서양을 우러러보며 동양을 깔아뭉갠다

요컨대 우마 서먼은 서양인으로서 그곳에 서 있는 것이다. 키 큰 금발의 여인이 수많은 일본인들을 피범벅의 사지절단 액션으로 제압하는 광경이 처참하면서도 대단히 코믹한 정서로 묘사된 이유 또한 이와 연관된다. 이 점은 홀로 수많은 적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난 다음 흡사 인간 푸줏간을 연상케 할 만한 지옥경을 내려다보며 어른이 아이를 야단치듯한 태도로 일갈하는 우마 서먼을 앙각(올려다보는 시선)으로 촬영한 대목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 순간 서양인은 명실상부한 어른으로 우뚝 서고 동양인은 일제히 철부지 아이의 자리로 내려앉는다. 그러니 불과 스무살에 세계 최고의 킬러가 되었다는 오렌과의 일대일 대결이 누구의 승리로 끝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게다가 오렌은 기모노 차림이다. 이미 <붉은 모란> 시리즈가 여실히 보여주었듯 기모노 액션에서 쓸 수 있는 공격 수단은 손밖에 없다. 긴 다리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우마 서먼쪽이 체력 낭비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 오렌의 최후조차도 머리 윗부분을 절단당하는 낭패스러운 몰골로 설정되었다. 단순히 유머라고 치부하기에 그 우스꽝스러움은 관객에게 같은 동양인으로서 불쾌감을 자극하는 정도가 지나치다. 현실사회적인 맥락에서 한국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야전병원 매쉬> <똑바로 살아라> <폴링 다운> 같은 선례들도 있지만, <킬빌>은 그런 맥락조차 깔끔히 생략했다. 이래도 다 신경과민으로 치고 편한 마음으로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는 걸까. 하기야 억울한 것은 항상 당하는 쪽의 몫이긴 하다.

김정수 | 소설가 · 영화 에세이스트 galadia@nate.com ⓒ 한겨레


음.. 대단한 내공이다.
영화꽤나 본 사람이군.
영화보면서 이런 방향으론 생각지 못했는데...
그냥 유머와 위트 가득한 흥겨운 액션극 정도로만 느꼈었는데...
참 예리한 시선이다. (설령.. 과민한 경향이 있다손 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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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강동훈 2003/12/19 21:39 # 답글

    같은 동양인으로써 불쾌감을 자극하는 정도? ㅋㅋ 조금 지나치다. 쿠엔틴은 한국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당연한거 아닌가 펄프픽션을 맨 최초로 극장으로 크래딧한 나라가 한국아니던가? 그로인해 알아가다가 아시아에 관심이 가지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할꺼면 동물이 인간을 골탕먹여 탈출하는 듯의 행위는 같은 인간으로써 불쾌감을 자극하나?-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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